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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왜곡된 4·19역사를 바로하자

광주3·15의거를 세워 4·19역사를 바로잡자

 

 

 

(김영용 호남419혁명단체 총연합회 상임대표)

 

 한국의 근현대사를 되돌아보면 바로잡고 새롭게 조명해야 할 사실들이 너무도 많다. 역사란 바로잡지 않으면 반드시 반복돼 그 피해가 후손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바로잡아야 할 역사가 4·19혁명이다.

 

4·19혁명은 5·16 이후 집권한 군부 정치세력에 의해 그 정치적 의미가 축소, 왜곡되었다. 5·16 군부세력은 정권의 정당화를 위해 제2공화국의 실정과 혼란을 부각시키고 제2공화국을 태동시킨 4·19혁명의 의미를 격하시켰다. 이렇게 폄하된 평가는 제3공화국, 유신시절을 거쳐, 5공화국과 6공화국 노태우정권시절까지 30여 년간 지속됐다. 김영삼 정권 때에서야 4·19는 비로소 혁명으로 복원됐다.

 

이 과정에서 역사피해를 가장 크게 입고있는 것이 광주3·15의거.

 

4·19혁명은 전개과정에서부터 잘못 표기돼왔다.

 

4·19혁명사의 왜곡지점이 바로 광주315 금남로 () 민주주의 장송데모를 빠트린 곳이다. 그래서 현재 419는 시작이 없는 사건처럼 되어있다. 4·19혁명의 시작은 광주 금남로에서 비롯됐다. 그것이 바로 1960년 부정선거를 최초 규탄했던 광주 금남로의 () 민주주의 장송데모로 4·19혁명의 첫 봉화(烽火)이였기 때문이다.

 

1960315일 선거전야, 전남의 민주당원과 시민들의 걱정은 선거투표장에서의 당장 당원들과 참관인의 신변 문제였다. 여수, 광산에서의 민주당원 살인사건은 투표참관인의 추천까지 어렵게 했고 선거분위기를 온갖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15일 아침부터 민주당 참관인의 투표소 입장이 거부당하고, 축출당하고, 어떤 곳에서는 부녀자가 투표통지서를 요구하자 폭행을 당해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됐다는 보고 등이 잇달았다.

 

당시 광주시 77개 투표소의 분위기는 어느 곳이나 대동소이했다. 투표소 백 미터 이내에는 자유당 완장부대와 반공청년부대가 여기저기 배치돼 있고 민주당원의 출입은 일체 허용되지 않았다. 아침부터 극도로 흥분한 민주당원과 시민들은 주권을 포기한 채선거사무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급기야 1245분 광주 금남로 4가 민주당 선거사무실 앞 1200명의 시민합세는 예상치 못한 광경이었다.

 

수백 명의 폭력경찰은 경찰국을 향해 밀고오는 데모대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붙들고 밀고 곤봉으로 치고 발로 차면서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데모대는 해산은커녕 더욱 발악하며 우리들의 발걸음을 막는 자 누구냐’ ‘너희들이 민주경찰이냐.’ ‘자유당의 앞잡이 불쌍한 괴한들아 물러가라고 피를 뿌리듯 우리들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자’ ‘ 민주주의 죽었네 아이고 아이고외치며 데모대는 땅바닥에 쓰려져 구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사실이 민주당 중앙본부에 보고됐고 그 사실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광주 금남로의 () 민주주의 장송데모가 오후 340분경 마산 3·15의 불길로 피어올랐다. 바로 419혁명의 도화선이다.

 

자칫하면 역사 속에 묻혀버릴 뻔한 이 광주 금남로의 () 민주주의 장송데모 진실은 동아·한국·조선일보 등에 모두 보도돼 있다. 사진도 남아있으며 장송데모에 참여했던 주역들 중 아직 생존해 계신 분들도 있다. 이 분들의 생생한 증언과 증빙자료들은 반드시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편입돼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이 지역 행정기관과 학계언론계사회계에서부터 합심해 나서야 한다. 역사복원은 시간이 흐를수록 어렵기 때문이다. 원래 4·19의 지향점은 민주주의 쟁취와 함께 통일이었다. 구호는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 였다. 4·19통일운동의 시작과 배경이 바로 광주 3·15의거였음을 역사는 부인하지 못 한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하나가 돼 4·19의 본래 정신인 민주주의의 DNA를 복원해낸다면 통일 역시 머잖아 이뤄질 것이다. 지금은 역사를 바로잡고 바른 미래의 길로 나아가는 4·19 DNA를 모두의 마음에 복원해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서는 4·19혁명의 첫 봉화(烽火)와 첫 피() 광주3·15의거를 바로세워 4·19혁명 전개과정의 시원(始原)을 정확히 한 4·19혁명의 바른역사를 하루속히 발현해 나가야 한다.

 

그래서 호남419혁명단체 총연합회가 먼저 기록정리에 나섰다. 여건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오랜시간 막연한 입장이였지만 다행히 평생 419 역사현장을 누비며 기록으로 남겨가고 있는 ‘419혁명통사저자 홍영유 작가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이 책자를 발간하게 됐다. 실로 55년만의 이 책자는 본 단체의 입장에서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닌 가도 생각되어진다.

 

당시 부상으로 일평생 후유증에 시달려온 조계현 419국가유공자와 장충식정진후 선생 그리고 박명서 전 국회의원 등 광주315 주역들의 성원에 감사드린다.

 

419혁명의 바른역사를 위한 광주315의거 실체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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