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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광화문에 4·19혁명 기념탑을 세우자

 4.19 국가 유공자 안승근 박사 

 

 

 4·19혁명은 맨 주먹 학생들이 강압적인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데 성공한 세계역사상 최초의 학생 민주혁명으로서 금년이 58주년이 되는 해이다.

 

오늘과 같은 민주화 국가 건설의 뒤안길에는 수많은 민주투사의 희생이 있었고, 그 요원한 불길은 4·19혁명정신으로부터 이어졌다.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라고 돼 있다.

 

3·1운동과 4·19혁명정신이 우리나라 건국헌법 정신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정부수립이후 이승만과 집권 자유당은 19603·15정부통령 선거에서 천인공로 할 부정선거로 장기집권을 하고자 했고, 이에 분노한 전국의 학생들이 부정선거에 대대적인 규탄데모를 일으켰다.

 

이러한 자유, 정의, 민주를 부르짖는 학생들과 시민들에 대하여 독재집단의 하수인들은 최후의 발악으로 총부리를 들이대어 3·15의거와 4·19혁명 때 광주/·부산/서울에서 186명이 경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고 7800여명의 부상자가 속출되었다.

 

이승만은 재임 중 부정과 부패가 극에 달했고, 1952년 땃뻘대를 동원하여 의회 기능을 마비시키고 발췌개헌을 통과 시켰는가 하면, 1954년 사사오입개헌으로 장기집권을 위한 헌정을 유린하고, 언론을 탄압하여 민주주의의 기치를 드높이 외치며 독재정권의 폭정들을 신랄하게 비판해 온 경향신문을 폐간 하면서 민주주의를 압살시켰으며, 친일파를 등용하고 반민특위를 해체하여 민족정통성을 훼손 하였으며, 정적을 죽이는 등 정치보복을 자행했다.

 

또한 19506·25 북한 공산당이 남침해 서울이 침범당할 위급한 상황일 때 국군통수권자인 이승만 자신은 27일 새벽 3시 경무대를 떠나 수원을 지나고 대전을 지나고 대구에 이르렀다.

 

그리고 너무 많이 내려온 것이라 하여 기차를 되돌려 대전으로 되돌아와서 그날 저녁 전화로 서울의 중앙방송국을 연결해 우리국군이 용감하게 적을 물리치고 있습니다. 국민과 공무원은 정부발표를 믿고 동요하지 마십시오라는 방송을 녹음했다.

 

KBS는 이 방송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까지 내 보냈다.

 

그리고 628일 새벽 230분쯤 총참모장 채병덕 일행이 한강 인도교를 건넌 직후 육군공병감 최창식 대령에 명하여 한강다리를 폭파했다.

 

다리 폭파 당시 한강다리에 피난민이 가득 있었는데 다리 위는 아비규환으로 1,500여명이 피난대열에 밀려 물에 빠져 죽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승만은 71일 대전에서 또 다시 도망 갈 때 목포로 가서 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그리고 9·28 서울수복을 했을 때 서울에 남아 고생한 뭇 시민들을 부역했다고 죽이고 고문하고 연좌제로 묶어 놓았다.

 

19501211일 주한미국대사관의 한국정부의 부역자 처리에 관한보고에 따르면 118일까지 합동수사본부에 체포된 17721명 중 민간법정에서 사형이 선고 된 사람은 353, 계엄군법제판에서 사형이 선고 된 사람은 713,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이 선고 된 사람은 232명이었다.

 

인민군 치하 3개월간에 걸친 부역자 중 진짜 부역자들은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올라갔고 남아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총 든 자들이 와서 짐 나르라니 짐 나르고, 집회 나와서 만세 부르라니 만세 부른 그런 사람들로서 검거 153825, 자수 397090명으로 총 55915명이 부역자로 처리되었고, 이들과 그 가족들은 두고두고 부역자 연좌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피해를 당했다.

 

이승만의 행적은 세월호 침몰 때 끝까지 남아서 승객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이준석 선장이 혼자 살고 보자며 먼저 탈출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은 탈출하면서도 학생들에게 동요하지 말고 객실 속에서 제자리를 지킬 것을 방송하였다.

 

이승만이 서울을 빠져 나오면서도 서울 시민들에게 탈출을 권고 할 수 있었고, 이준석은 세월호를 빠져나오면서도 승객들에게 같이 탈출하자는 얘기를 할 수 있었다.

 

세월호 침몰사고 합동수사본부는 구속 수감 중인 이준석 선장에게 업무상 과실치사죄 보다 무거운 부작위 살인죄’(타인을 죽게 할 의도가 있는 고의범, 형법 제187)를 적요하기로 했으며, 역시 선박직 직원 15명을 일괄 기소키로 했다.

 

때 늦은 사안이긴 하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도 이준석 선장의 범죄 형량에 해당되는 범죄자가 아닐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이승만의 집권기간 독재 죄악사은 접어둔 채 지난 20088월 정체불명의 대한민국 사랑회에서 전 국무총리들의 실명을 기명하고 각계 지도층 인사 300인이 함께 주도한다면서 자유와 번영의 울타리를 만든 분은 이승만 건국대통령이다!’ ‘한국인은 지금 건국대통령을 구박한 퇴 값을 치르고 있다’ ‘4·19때 끌어 내렸던 이승만 동상을 광화문에 다시 세우자‘ ’이승만 기념관을 만들자‘ ’고액권에 이승만의 얼굴을 넣자‘ ’우남도로를 정하자‘ ’이승만 기념공항도 정해야 한다, 고 일간신문들에 도배질하듯 광고하였고, 그리고 국민행동본부, 뉴라이트 국민연합, 자유총연맹 등이 또한 연대하여 크게 광고를 하면서 모금운동과 함께 국민들을 선동하고 있다.(조선일보 200881330, 81431)

 

이승만 동상을 광화문에 세우자는 등의 숭모사업은 독재의 총탄 앞에 무참히 쓰러진 수많은 4·19혁명 희생자의 피의 대가로 이룩한 위대한 4·19혁명의 숭고한 역사를 반세기도 되기 전에 뒤 엎는 망령된 행동으로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말살하려는 역사왜곡이며, 반사적으로 숭고한 4·19혁명을 폄훼하는 일이다.

 

우리나라가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한 자유, 정의, 민주의 4·19혁명이 있었기에 세계역사상 가장 빠르게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여 선진국대열에 진입할 수 있었고, 오늘의 자유와 풍요를 만끽하게 되었음을 알아야한다.

 

독재자의 동상을 광화문 네거리에 건립한다는 등의 반역사적이고 숭고한 4·19혁명정신을 모독하는 이승만 기념 모든 계획들은 저지되어야 한다.

 

4·19혁명이 작금에 와서 점점 과소평가 되고 있고, 독재자 이승만을 추앙하려는 정서가 점점 독버섯처럼 확산되어가고 있는 현실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이승만이 아니면 건국도 반공도 이룩될 수 없었던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숭고한 4·19혁명정신을 훼손하는 것은 자유, 정의, 민주를 위해 투쟁해 온 살아있는 4·19혁명주체들이 결단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독재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라도 숭고한 4·19혁명정신을 영구히 기념하고 계승발전 되도록 혁명 60주년이 되어가는 오는 2020년 전에 419민주혁명의 격동중심지인 태평로에 4·19혁명 기념탑 건립, 그리고 4·19혁명 기념관 건립 등을 조속히 시행해야 한다.

 

19604·19혁명 직후인 519일 필자(419당시 국립항공대학 학생회장, 4·19혁명 중앙대책위원)가 제안하여 ‘41·9혁명 순국학생위령탑 건립위원회를 각 대학 대표자들로 구성한 후(1960519일 동아일보 기념탑 건립취지 및 위원명단광고) 서울시청광장에 기념탑을 건립키로 하고 기념 탑 설계도를 공모하여 당첨 설계도를 확정 지었고, 전 국민들의 성원 속에 건립기금 모금을 진행하여 모금누계가 38백 여 만원이나 모아졌었다.(동아일보 1962627일자)

 

그 모금운동은 5·16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무산 되었다.

 

1960년 당시 3·15부정선거를 파헤치면서 신랄하게 불법사례들을 보도하여 학생들에게 정의의 울분을 자아내도록 촉발시킨 언론이 경향신문이었다.

 

58년 전 4·19혁명 주역들이 4·19혁명 기념탑을 건립키로 합의하였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조절되었던 기념탑 건립을 4·19혁명 60주년 전에 독재타도 격동의 중심지였던 태평로 가운데 청계천 시발지점에 설치된 소라탑 자리에 4·19혁명기념탑을 건립하고, 그 지하공간에 4·19혁명 기로사진들을 전시하여 세계역사상 유일하게 독재정권을 학생들이 무너뜨린 숭고한 민주혁명정신을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역사교육 현장으로서, 그리고 국내외 관광객들이 한국의 민주화 혁명을 체험할 수 있는 명소로 만들어 4·19혁명정신을 영구히 고취하고 계승되도록 해야 할 것을 촉구한다.

 

2018. 9

 

 

참고 제2공화국은 ?

 

2공화국은 1960615일부터 1961516일까지 불과 11개월간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두 번째 공화 헌정체제이다.

 

2공화국 체제는 1960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 된 후, 허정 과도정부(1960427~ 614)를 거쳐 6·15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이다.

 

국무총리는 장면, 대통령은 윤보선이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후, 민주당이 주도한 국회는 의원 내각제와 양원제를 권력 구조의 핵으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민주당 정권은 자유주의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경제개발계획을 통한 산업입국을 꾀했으나,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러한 계획을 구체화할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4·19혁명을 계기로 분출된 각계각층의 요구에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장면 정권은 군사반란의 조짐을 보고받고도 미국에 기댄 안이한 판단으로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반란세력에 속수무책으로 정권을 탈취 당하였고, 결국 제2공화국은 19615·16군사쿠데타에 의해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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